군대썰 #1 장군의 비서(공군장교 부관)

공군 학사사관 후보생

군대썰을 한번 풀어보자. 나는 공군 학사사관 후보생 131기로 임관하며 공군장교로써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재수-일본유학-지진휴학 크리티컬로 인해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를 했다. 일반 병사로 들어가기엔 조금 쪽팔리기도 하고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친구도 있었기에, 임관 전 훈련 포함 3년3개월이나 소요되는 학사장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공군을 선택한 이유는? 그냥 간지나고 스마트해보여서였다.

군대썰
몇 주동안 연습한 임관식

임관 후 자대배치

3개월 간의 고된 임관 전 훈련을 마치고 신임 소위가 된 나는 우수한 성적빨(?)로 수도권의 작전사령부(오산 Base)에 배치받았고, 희안하게 군수특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보처로 배정받았다.

이 사태에 대해 인사과에서 고민하던 차에 마침 참모장 부관 자리가 공석이 나버렸고, 인사과장은 갈 곳없는 신임 소위가 있다는 소식에 나를 불러 복도에서 잠깐 보더니 “어! 허우대도 멀쩡하고, 얼굴도 괜찮고, 너가 하면 되겠네!”라고 했고, 이틀 뒤 나는 선임 부관에게 인수인계 받고 있었다.

공군장교
공군 작전사령부 마크

전속 부관이란?

전속 부관(나무위키-전속부관)이란 장군비서 역할을 맡는 군인으로써,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며 제반의 사항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도때도 없이 보고를 올리고 싶어하는 처장(대령급), 과장(중령급)님들과 장군의 컨디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하고, 외부 행사라도 있으면 아침 동선을 분 단위로 체크하며 현지 부관 및 담당자와 연락을 긴밀하게 유지해야 한다.

아침에 별을 보며 출근하고, 밤에 별을 보며 퇴근하는 나날이었다. 신임 소위에게는 생각보다 벅찬 업무라고 생각하면서 1년 정도 식은땀에 쩔은 군생활을 하며 두 분의 장군을 모셨고, 어느 정도 짬밥이 찬 중위가 되어 세번째 참모장님을 모셨다.

차…참모장님?

보통 공군 작전사령부 참모장 자리에는 준장(원스타)이 온다. 이례적으로 대령이 나의 세번째 지휘관으로 오셨고, 물론 이 후 준장(진)이 되셨다. 그 분은 처음 부관이라는 것을 거느려보신 탓인지, 아니면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별로 없으셨던 탓인지, 참모장 부관자리에 일년 넘게 자리잡고 있는 나를 그대로 쓰신다고 하셨고, 나는 실제 그 분을 뵙기 전에 성함을 듣게 되었다.

김….김정일 참모장님….

전속 부관
그래, 하지만 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이름이 다양하다지만, 이런 분을 뵙게 되다니… 대한민국 공군의 김정일 대령님, 아니 준장(진)일 때는 의례 장군칭호를 붙이니, 김정일 장군님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분이셨다.

이름만 들으면 어떤 사람일지 감도 오지 않는 상황이지만, 지휘관으로서 그 분은 “덕장(德將)” 그 자체셨다. 친근한 목소리에서는 기품이 느껴졌고, 눈빛은 따뜻하지만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 사람을 질책하기 보다는 안되는 이유를 듣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셨고, 운전병과 관용차를 대기시키기 보다는 본인 자가용에 부관을 조수석에 태우고 이동하시길 즐겼다. 처음 보는 타입의 지휘관은 나에게 굉장히 신선했고, 지금까지도 나는 리더로써의 롤 모델로 생각할 정도로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모두 한 번 생각은 해봤지만,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

오산기지의 공군은 경계 철조망을 공유하는 미 7공군과 연례적으로 연합 훈련을 실시한다. 시작 전 훈련 준비를 하다 보면, 지휘관의 작전구역 임시 출입증을 의례 작전과에서 만들어 가져왔다.

그 날은 평화로운 평일이었고, 예하 부서들이 훈련 준비로 바쁜 모양인지 보고도 거의 없었다. 지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쳐 조금 읽고 있자니 조금 졸리던 와중에, 작전과장이 들어와서 “부관아, 이거 참모장님 임시출입증인데, 좀 넣어드려라.”하며, 플라스틱 임시출입증에 목걸이 줄을 둘둘 말아서 건네길래 받아들었다.

“알겠습니다, 필승.”하며 사령부 전체회의로 회의실에 가셔서 비어있는 참모장실로 들고 들어가서 집무실 책상 한켠에 보기 좋게 놓고 나왔다.

참고로 장군 집무실에는 두가지 출입문이 있다. 보고자들이 드나드는 부관실을 통한 출입문이 있고, 장군이 드나드는 주 출입문이 있다. 주 출입문에는 적외선 센서가 있어서 사람의 출입을 감지했고, 들어오거나 나가면 복도쪽 일성(一星) 성판이 불이 들어오거나 꺼지게 되어, 지휘관이 집무실에 있는지 여부를 복도쪽이나 부관실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장군의 비서
요런 성판이 주 출입문 위에 달려있다.
색상은 공군이라 파란색이었다.

어쨋든 30분쯤 지났을까, 출입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성판에 불이 들어왔다. 김정일 장군님께서 주 출입문으로 들어오신 것 같았다. 잠시 후 집무실 안쪽에서 부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관아 일로 와봐라”

나는 1초의 딜레이도 없이 “네, 참모장님”이라 대답하며 부관실쪽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집무실 책상에 앉아 계신 참모장님 곁으로 다가갔다.

참모장님께서는 “이거 출입증 다시 좀 받아야겠다.”라고 하셔서, “네, 알겠습니다.”하고 이유도 묻지 않고 일단 들고 나왔다. 가지고 나와서 출입증을 바라본 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두려움? 아니다… 놀람? 그것도 아니다… 경악? 그것과 조금 비슷하지만 또 다른 감정이었다. 식은땀이 난다라는 표현이 모자라 줄줄 흘렀고, 닭살이 올르다 못해 승천할 것 같았다.

미군과의 연합 훈련이기 때문에 프린팅된 참모장님의 사진 밑에는 영문으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Il Sung Kim

내가 28년 동안 영어를 잘못 배웠을 것이다. 아니면 뭔가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을 것이다. 사실 본명이 김일성이라는 다른 현역 장군이 있고, 그 분의 것이 착오로 인해 이쪽으로 왔으리라… 차라리 그 쪽이 더 좋은 상황이었다.

김일성 - 나무위키
이 사람까지 등장해버렸다

그 출입증을 바라보며 1분 정도 정지한 채로 있다가, 정신을 차려 작전과장 직통전화로 전활 걸었다.

“응, 부관아” / “필승, 과장님 아까 출입증 때문에 좀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응? 왜 그래?” / “참모장님 영문 성함이 좀 잘못 적혀있습니다.”

“아, 그래? 바로 갈게~”

심각성을 모르는 작전과장은 부관실로 찾아왔고, 30초 정도 방금 전 나와 같은 상태로 출입증을 바라봤다. 확실히 중위보다는 짬밥이 있었는지, 충격에서 빠져나와 정신차리는 속도도 빨랐다.

“참모장님 보셨니?” / “네, 보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든” / “다시 만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정신차린 작전 과장은 임시출입증을 들고 리우올림픽 우사인볼트와 같은 모습으로 작전과로 돌아갔고, 순식간에 출입증은 다시 만들어져 이번에는 작전과장이 직접 들어가 참모장님께 전해드렸다. 약 10~15분 상간에 작전과장은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10년 정도는 늙어보였고, 상대성 이론을 실생활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전해드릴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닫힌 부관실 쪽 출입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들어봤지만, 큰 소리는 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역시 우리 김정일 장군님, 덕장의 면모를 보이신 것 같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의 원인

사건의 발단은 작전과로 배치되고 얼마 되지 않은 병아리 신병이었다. 물론 전속 부관인 내가 직접 얼굴을 볼 일은 없었지만 노란색 견장을 달고 임시출입증 발급을 위해 지휘관 명단을 손에 든채로 컴퓨터에 영문명을 하나하나 쳐나갔으리라…

나름 중책을 맡아 긴장을 한 것인지 병아리 신병은 김정일 이름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김일성을 떠올렸으리라…

이 반공정신 투철한 새끼… 거기서 왜?…

군대썰
진짜 왜 거기서 나와

어쨋든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난 이 사건으로 평생 울궈먹을 레전드 썰을 경험했고, 어떤 남자 집단을 만나든 이 썰을 풀면 다들 빵 터지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한 때는 진절머리 났던 장교생활도 요즘 들어서는 가끔 그립기도 하다. 이것이 나의 썰 카테고리의 첫 부분을 담당할만 한가?


김정일 장군님, 잘 계시지요?
결혼 이후 보직 이동때문에 신고드릴때 제 미래에 대해서 축복해주신 것 잊지 않습니다.
장군님도 뜻하시는바 이루시길 간절히 바라고, 응원합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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